[리뷰] 영화 <러브레터>▲ 영화 <러브레터>의 한 장면.ⓒ 제이앤씨미디어그룹
1995년 최초 개봉 이후 족히 10번 가까이 우리를 다시 찾아온 '일본 영화'의 전설, '재개봉'의 전설, '설원'의 전설 <러브레터>는 불과 얼마 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나카야마 미호의 소식으로 다시 한번 화제가 됐다.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한 그녀의 소식에 많은 이가 탄식을 금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는 일본 오타루의 설원이 주요 배경이지만 무지 춥다기보다 오히려 마음을 따뜻하게 데우는 감성이 뚝뚝 묻어난다. 초중반까진 '뭘 말하려는 걸까?', '왜 이렇게 뚝뚝 끊기는 느낌일까?' 하는 생각으로 집중하기조차 힘들지만 중반부쯤부터 이와이 슌지 감독 특유의 감성 터치에 가슴이 촉촉하게 스며 들어갈 뿐이다.
이토록 호불호가 갈리는 '거장'도 없을 텐데 이와이 슌지가 그러하다. 영상, 음악, 배경 등 온갖 장치를 이용해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집중하는 편이라 다른 요소들이 상대적으로 묻히는 감이 있다. <러브레터>의 경우 배우 자체를 장치로 이용해 감상 포인트를 다각화했다. 스토리, 연기, 메시지 등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슌지는 뮤직비디오 감독과 다름 아닐지 모른다.
죽은 남자친구와의 편지 교환
와타나베 히로코는 죽은 옛 남자친구 후지이 이츠키의 3주기 추모식에 참석한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산에 갔다가 실족사로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며 이츠키의 어머니를 태웠고 집으로 초대해 방문한다. 거기서 이츠키의 중학교 졸업 앨범을 보곤 그의 옛 집에 편지를 보내본다. 지금은 집터조차 남아 있지 않았으니 편지가 하늘로 향할 거라고 믿은 히로코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후지이 이츠키에게서 답장이 왔다. 와타나베 히로코의 편지는 그녀와 거의 똑같이 생긴 여자 후지이 이츠키에게 도착한 터였다. 그렇게 그들은 편지를 주고받는다. 알고 보니 중학교 때 3년 동안 같은 반에서 지낸 동명이인이었다.
한편 히로코는 썸을 타는 선배 아키바와 함께 호타루로 향한다. 히로코와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고 싶은 아키바는 히로코에게 마음을 정리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히로코가 시종일관 답답한 면모만 보이는 건 비명횡사한 남자친구를 아직 못 잊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은 남자친구와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고 믿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연한 기회에 죽은 남자친구의 어린 시절을 들여다보고, 그가 왜 히로코에게 첫눈에 반했는지 알게 되며, 그가 죽은 곳까지 직접 찾아가 마음의 방황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 영화가 지향하는 장르는 로맨스임에 분명하나 다분히 철학적이고 문학적이고 인류학적인 함의가 담겨 있다. 잊지 못할 사랑과 처음 느낀 사랑이 주된 이야기를 형성하나 그 뼈대를 이루는 것들은 상당히 묵직하다. 과거의 시간이 그곳에 그대로 머무는 게 아니라 다시 발견돼 현재의 시간을 보완해 준다는 건 철학적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상당히 영감을 받은 듯한 영화의 주요 스토리 라인은 문학적이다.
무엇보다 히로코가 아키바와 따로 또 같이 호타루를 여행하고, 현재의 이츠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죽은 이츠키를 추억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는 건 그 자체로 인류학적이다. 사람을 향한 진심이 담겨 있다. 죽은 사람을 온전히 보내면서 '잘 지내고 있냐'라고 안부를 묻는 건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추모다.
죽음·사랑·운명의 방정식
▲ 영화 <러브레터> 포스터.ⓒ 제이앤씨미디어그룹
갑작스레 찾아오는 죽음을 막을 도리는 없다. 당사자는 생각이나 행동을 할 새도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테다. 그런데 남은 사람들은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할 수 있으니 그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잊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게 이 땅 위에는 수많은 죽음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그들은 각자 힘겹게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영화는 바로 그들에게, 남은 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다. 너무 힘들겠다고, 최소한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 한다고,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냐고, 그러려면 죽은 자를 그리고 예전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알아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러브레터'는 과거의 나와 그에게, 부지불식간에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홀로 남겨진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다.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사랑하지만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지만 사라지고 마는 관계들. 모두 다 어쩔 수 없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어떡하든 그렇게 되고야 마는 것들이다. 운명의 장난이랄까. 그럴 때 우리는 그 사랑과 사람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마주 보고 정리하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ingenv.tistory.com과 contents.premium.naver.com/singenv/themovie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