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우에노 주리 주연의 음악영화 <스윙걸즈>1986년에 결성된 고 김현식의 백업 밴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은 한국대중음악에 큰 영향을 미친 뮤지션들을 대거 배출했다. '가객'으로 불린 보컬 고 김현식은 말할 것도 없고, 기타리스트 김종진과 드러머 고 전태관은 1988년 재편해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2인 밴드로 재탄생했다. 베이시스트 장기호와 뒤늦게 합류한 키보디스트 박성식은 사랑과 평화를 거쳐 1990년 빛과 소금을 결성했다(박성식 이전의 키보디스트는 '무려' 고 유재하였다).
비록 멤버들의 포지션도 다르고 이미지도 달랐지만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빛과 소금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밴드음악을 기반으로 재즈와 브루스를 접목한 소위 '퓨전 재즈'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록밴드를 자처하는 여러 밴드들 사이에서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빛과 소금은 세련된 사운드와 개성 있는 보컬,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를 통해 대중들이 음악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게 도움을 줬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두 밴드가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지금, 대한민국에서 재즈를 전면에 내세운 대중가수는 거의 사라졌다. 아쉽게도 현재 국내에서 재즈는 마이너 음악으로 일부 마니아들이 찾아 듣는 음악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지난 2000년대 중반 일본에서는 '재즈의 대중화'에 앞장 섰던 소녀들이 크게 화제가 된 바 있다. 낙제 여고생들의 재즈 밴드부 결성 스토리를 담은 일본의 하이틴 코미디 영화 <스윙걸즈>였다.
▲ <스윙걸즈>는 재즈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충분히 재미 있게 감상할 수 있는 영화다.ⓒ 데이지엔터테인먼트
<스윙걸즈> <노다메 칸타빌레>의 히로인
1986년 일본 효고현의 가코가와시에서 태어난 우에노 주리는 일본의 많은 배우들이 그런 것처럼 10대 시절이던 2002년에 데뷔했다. 우에노 주리는 2003년 국내에서 <조제>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된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 분)의 여사친 카나에를 연기하면서 조제(이케와키 치즈루 분)와 묘한 삼각관계를 그렸다. 그리고 우에노 주리는 2004년 <스윙걸즈>의 주인공에 낙점됐다.
우에노 주리는 <스윙걸즈>에서 여름방학에 보충수업을 받으러 학교에 나왔다가 얼떨결에 밴드부에 합류하게 된 발랄한 소녀 토모코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우에노 주리는 <스윙걸즈>를 통해 일본 아카데미와 요코하마 영화제 신인배우상을 수상하면서 라이징 스타로 급부상했다. 그리고 2006년 후지 테레비를 통해 방송된 그녀의 진정한 출세작이자 대표작이 된 동명 만화 원작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를 만났다.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주인공 노다 메구미를 연기한 우에노 주리는 '만화 속 노다 메구미가 튀어 나왔다'는 극찬을 받으며 드라마의 인기를 주도했다. 실제로 <노다메 칸타빌레>는 우에노 주리의 커리어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작품이 됐다. 드라마에서 그녀가 부른 노래 <방귀 체조>가 음반으로 발매되면서 가수로 데뷔했고 2008년과 2009년에는 애니메이션 3기 분량으로 만든 극장판에 출연하기도 했다.
2006년에만 5편의 영화에 출연할 정도로 강행군을 펼친 우에노 주리는 2011년 대하드라마 <고우 ~공주들의 전국~> 이후 휴식기를 가졌다. 2014년에는 오랜만에 한국을 찾아 <노다메 칸타빌레>의 리메이크작 <내일도 칸타빌레>에서 설내일 역을 맡은 심은경을 만나 원작의 주인공으로서 조언을 해줬다. 2015년에는 한국영화 <뷰티 인사이드>에서 74번째 우진 역으로 출연했는데 이는 우에노 주리의 커리어 첫 해외영화 출연이었다.
2018년 동명의 한국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굿 닥터>에서 문채원이 맡았던 차윤서 캐릭터를 연기한 우에노 주리는 2019년과 2020년 두 시즌에 걸쳐 방송된 <감찰의 아가사오>를 통해 컨피던스 어워드 드라마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22년부터 활동 초기 그녀의 매니저였던 이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연예 기획사와 업무제휴를 맺고 활동하는 우에노 주리는 국내에도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대표적인 일본배우 중 한 명이다.
재즈 몰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
▲ 연습할 곳이 없었던 소녀들은 동네 노래방에서 연주를 하다가 사장에게 쫓겨난다.ⓒ 데이지엔터테인먼트
<스윙걸즈>는 낙제 여학생들이 밴드를 결성해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크게 유행했던 스윙재즈를 연주하면서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다. 영화의 제목에도 들어가는 '스윙'은 좋은 음악을 들었을 때 느껴지는 흥이나 본능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신체적 반응들을 의미하는 말이다. 영화의 내용에 대해 지레 겁을 먹는 관객들도 있지만 재즈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더라도 영화 <스윙걸즈>를 감상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스윙걸즈> 촬영 당시 우에노 주리를 포함해 밴드 멤버를 연기한 배우들은 대부분 고등학생이었는데 3개월 동안 합숙훈련을 하면서 악기 연주를 배워 촬영을 진행했다. 촬영은 주로 도호쿠 지방 야마가타현 내의 야요네자와 시를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이 때문에 출연자들도 영화에서 그 지역 사투리를 사용했다. 영화 개봉 후에는 배우들이 촬영지였던 야마가타현에서 팬미팅 겸 라이브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
2억 5000만 엔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스윙걸즈>는 24억 엔의 흥행성적을 기록했고 2005년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우수감독상과 최우수 각본상, 최우수 음악상, 녹음상, 편집상, 남녀신인상을 휩쓸었다. 영화 내내 크고 작은 웃음코드가 끊이지 않고 밴드부에게 여러 시련들이 찾아오지만 씩씩한 소녀들은 결코 주눅 들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한국의 코미디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웃다가 울리는 전개' 역시 <스윙걸즈>에서는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눈길을 뚫고 힘들게 공연장에 도착한 스윙걸즈 멤버들이 대회에서 연주를 하는 마지막 장면은 유쾌한 웃음과 묵직한 감동을 동시에 선사한다. 처음엔 악기세팅도 제대로 하지 못해 당황하던 소녀들은 우여곡절 끝에 튜닝을 마치고 연주를 시작한다. 그렇게 조금씩 실력을 발휘하는 스윙걸즈 멤버들은 중반부터 환상의 호흡을 선보이며 무대를 장악하고 퇴장하다가 다시 객석에 앉은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환호와 박수를 받는다.
<스윙걸즈>에서 관객들에게 가장 큰 웃음을 줬던 장면은 단연 산에서 송이버섯을 캐다가 얼떨결에 멧돼지를 잡는 장면이다. 소녀들의 요란스런 움직임과 상반되는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면서 역설적인 상황에서 웃음을 전달했다. 1년 후 한국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도 멧돼지를 잡는 장면이 나오면서 표절논란이 있었는데 멧돼지를 잡는 상황만 같을 뿐 세밀한 연출은 전혀 다르다.
세상 조용했던 '안경소녀'가 외친 한마디
▲ 말 없이 조용한 소녀 세키구치(오른쪽)는 특훈에서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며 친구들을 놀라게 한다.ⓒ 데이지엔터테인먼트
히라오카 유타는 <스윙걸즈>에서 토모코를 비롯한 여학생들 때문에 도시락을 먹지 못해 홀로 식중독에 걸리지 않고 낙제 여학생들을 모아 밴드부를 결성하는 나카무라 타쿠오를 연기했다. 나카무라는 연주는커녕 악기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소녀들에게 기발한 방법으로 특훈을 시켜 연주가 가능하게 만든다. 응원단에서 심벌즈를 담당했던 나카무라는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워 밴드부에서는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밴드의 리더 역할까지 맡았다.
청소년 매력의 배우 모토카리야 유이카는 <스윙걸즈>에서 가장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멤버 세키구치 역을 맡았다. 세키구치는 발랄한 친구들 사이에서 좀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나카무라의 특훈에서 발군의 폐활량을 선보이면서 트럼본 주자로 낙점됐다. 평소 소심하고 말도 단답형으로만 하던 세키구치는 마지막 공연 전 멤버들이 악기를 튜닝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잠깐만"을 외치면서 소란스런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으랏차차 스모부>와 <쉘 위 댄스> <워터보이즈> 등 국내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영화에 많이 출연했던 명배우 타케나카 나오토는 <스윙걸즈>에서 재즈를 사랑하는 오자와 선생을 연기했다. 오자와 선생은 영화 후반 나카무라에게 재즈 초보임을 들켜 지휘를 포기하지만 제자들을 보기 위해 공연장에 찾아가 먼발치에서 지휘를 했다. 오자와 선생은 멤버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스윙을 연주하라"는 결정적인 조언을 해준 인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