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의 씨네만세 709]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다시 보다: 25 50'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올해로 제25회째를 맞은 '전주국제영화제'다. 지난 사반세기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전주국제영화제는 한국을 넘어 아시아에서 손꼽는 국제 경쟁영화제로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했다. 적잖은 수의 영화제가 내실을 키우지 못한 채 고꾸라졌음을 고려하면 이 영화제의 번듯한 오늘이 남다르게 느껴진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오늘에 이르는 동안 한국영화 또한 성장을 거듭했다. 외연과 내실 모두가 그러해서, 한국이 배출한 명감독 가운데 세계적 거장으로 우뚝 선 이가 벌써 여럿이다. 산업 규모 역시 대단해서 매년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블록버스터가 꾸준히 제작된다. 천만 관객이 든 영화가 벌써 32편이 나왔고, 기라성 같은 배우들도 수두룩하게 배출됐다. 지난 역사를 통틀어 작금이 한국영화의 전성기라 해도 과언은 아닐 테다.
한국영상자료원은 한국 영화사의 내실을 뒷받침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이다. 영화를 비롯한 영상자료를 수집하고 그 가치를 개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기관이 올해로 50년을 맞아 25년이 된 전주국제영화제와 함께 특별전을 준비했다. 전주국제영화제 가운데 상영되는 '다시 보다: 25 50' 섹션이다.
▲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포스터ⓒ JIFF
25살 전주, 50살 영자원이 주목한 영화
'다시 보다: 25 50'은 지난 시대 한국영화의 주목할 만한 작품을 전주가 자랑하는 상영환경 가운데 내보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국영화계의 명감독의 자리한 이들의 초기작을 선정해 4K 리마스터링, 즉 고화질 디지털로 전환한 작품을 관객 앞에 선보이는 것이다. 이중 류승완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있다.
'다시 보다: 25 50' 섹션 선정작 가운데 가장 앞서 상영된 작품이 바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다. 이 영화가 이 섹션에 선정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한국영화계가 수많은 명감독을 낳았고, 그들 중 많은 수가 멋드러진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그중 데뷔작부터 제 재능을 뽐낸 이는 그리 많지가 않다. 뛰어난 신예가 탄생했음을, 향후 한국영화계의 기수가 될 존재를 알렸음을 드러낸 충격적 데뷔작은 그래서 귀하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한국 영화사상 손꼽을 만한 데뷔작이다. 최동훈의 <범죄의 재구성>, 김지운의 <조용한 가족>,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등과 함께 한국 영화감독 데뷔작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작품이다. 이밖에는 나홍진의 장편 상업영화 데뷔작 <추격자>, 연상호의 실사영화 데뷔작 <부산행>, 영화 마니아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 정도가 언급될 수 있겠다.
▲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스틸컷ⓒ JIFF
한국영화가 손꼽는 전설적인 데뷔작
이들 데뷔작 사이에서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존재감을 과시한다. 소위 잘 배운 감독들의 때깔 좋은 작품의 인상이 전혀 없는, 적나라하고 원색적인 느낌을 팍팍 풍기는 날것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액션영화를 돌려보며 독학으로 영화를 찍은 이십대 중반의 젊은 감독은 자투리 필름을 모아 찍은 단편에다 시차를 두고 찍은 다른 단편 세 편을 이어 붙여 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독특한 옴니버스 영화를 완성시켰다.
첫 편은 당구장에서 벌어진 패싸움이다. 공고와 예고 학생들이 시비가 붙어 서로 싸움을 벌이고, 이 과정에서 한 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적나라한 폭력을 그린 날 것 그대로의 액션은 이 장르에 대한 감독의 특별한 관심과 열정이 어떠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후 세 편의 단편은 시간 순서에 따라 연대기적으로 구성돼 있다 봐도 좋겠다. 두 번째 이야기엔 '악몽'이란 이름이 붙었다. 7년 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한 이가 있고, 그가 사회에 나와 겪게 되는 고충들이 있다. 전과자가 마주하는 가혹한 삶과 살인에 따른 트라우마 가운데 액션과 공포가 어우러진 독특한 풍의 단편이 전개된다.
▲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스틸컷ⓒ JIFF
폭력의 연쇄, 그 본질을 보게 한다
다음 '현대인'은 형사와 조폭의 혈전을 담았다. 네 편 중 두 번째로 찍은 단편으로 단순하지만 선명한 이야기 가운데 두 사람의 혈투를 처절하게 묘사했다. 이어 마지막 편은 이 네 단편을 하나의 극장용 장편영화로 묶어내도록 한, 또 류승완이란 감독의 이름을 영화팬들 사이에 각인시킨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되겠다. 잔인한 액션 때문인지 흑백으로 전환된 화면 가운데, 조폭조직에 가입해 폭주하는 양아치와 그가 벌이는 파격적인 싸움들을 전면에서 다룬다.
특히 양아치 역을 맡은 배우 류승범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엄청나서 이전까지 그의 존재를 몰랐던 관객을 단박에 압도한다. 형인 류승완이 연출에서 그러하듯 정통으로 연기를 배운 적 없는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 당시 잘 만들어진 매끄러운 연기만 접하던 관객에게 신선함을 넘는 자극을 주었다.
처음 가볍게 일어났던 폭력이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겉잡을 수 없는 비극의 소용돌이로 관계된 이들을 이끌고 가는 모습이 폭력의 본질을 단면으로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 거창한 메시지를 이 영화로부터 끌어내는 것이 과연 타당한 비평인지는 알 수 없겠으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진한 폭력의 향연 가운데서 그 본질을 생각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다는 점 만큼은 분명하다.
▲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JIFF
오늘 한국영화의 중추가 되기까지
채 1억 원을 들이지 않은 작은 영화가 8만 관객을 모으며 일으킨 돌풍이 그야말로 대단해서 류승완은 단박에 충무로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신예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주먹구구식 액션으로 일관하던 당대 영화 풍토 가운데서 류승완이 찍어낸 색다른 액션연출은 할리우드 영화와의 격차를 실감하고 있던 당시 관객에게 큰 만족감을 선사했다.
그는 이로부터 <다찌마와 리>를 인터넷 영화로 제작해 유통하며 화제를 던졌고,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대작전> <짝패> <주먹이 운다> 등 다양한 액션영화를 연달아 연출하며 한국 액션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성장했다. 특히 <피도 눈물도 없이>부터 함께한 정두홍 무술감독과의 동행은 류승완 표 액션영화의 품질을 보증케 하는 마지막 단추가 되었다.
2010년 <부당거래>부터 2013년 <베를린>, 2015년 <베테랑> 등 한국 영화사를 가로지르는 명작들을 낳기까지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이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란 데 이론의 여지는 얼마 없다. 이제는 모르는 이가 없는 류승범, 정재영, 임원희, 안길강 등의 젊은 시절을 살필 수 있고, 정정훈 촬영감독, 장건재 감독의 모습도 등장한다. 전주국제영화제가 25년 만에 이 작품을 새로 상영하는 이유를 알만도 하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