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르완다 학살' 소재로 만든 <호텔 르완다>수많은 히어로들이 등장하며 관객들에게 최고의 볼거리를 제공했던 <어벤저스> 시리즈에서 가장 저평가된 캐릭터는 단연 제임스 로드 중령이 입는 수트 '워 머신'이었다. 워 머신과 함께 솔로영화가 없는 호크아이의 경우엔 출연하는 영화마다 주인공 못지 않은 비중과 활약을 선보였지만 워 머신은 6편의 영화에서 한 번도 주역으로 활약한 적이 없다. 그만큼 워 머신은 <어벤저스> 내에서 철저한 조연에 불과했다.
실제로 아이언맨은 영화마다 수트 업그레이드를 거듭하다가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에서는 최첨단 '나노수트'까지 등장했다. 반면에 워 머신은 몇 번의 수트 업그레이드가 있었음에도 영화에서 한 번도 크게 부각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어벤저스>의 실질적인 주인공 아이언맨이 울트론이나 타노스 같은 보스 캐릭터들을 상대할 때 워머신은 공중에서 각종 재례식 무기들을 투하하며 주로 엑스트라 악역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워 머신이 <어벤저스> 시리즈에서 평가절하됐다고 해서 워 머신을 연기한 배우 돈 치들까지 낮게 평가하면 곤란하다. 돈 치들은 <오션스> 시리즈와 <어벤저스> 시리즈로 유명한 배우임에 분명하지만 2004년에는 이 영화를 통해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적도 있다. 1994년 르완다 내전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을 영화화한 테리 조지 감독의 <호텔 르완다>였다.
▲ <호텔 르완다>는 르완다에서 1000명이 넘는 난민을 보호했던 실존인물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주)동숭아트센터
'신비의 대륙' 아프리카 소재로 만든 영화들
최근엔 디디에 드로그바, 모하메드 살라 같은 세계적인 축구스타들과 콩고 출신 방송인 조나단 덕분에 많이 친근해졌지만 아프리카는 여전히 한국을 비롯한 세계 사람들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신비의 대륙'이다. 실제로 몇몇 나라를 제외하면 여전히 극빈국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아프리카 대륙을 배경으로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만들어지면서 관객들에게 아프리카 대륙이 꾸준히 소개되고 있다.
<록키>를 만들었던 고 존 G. 아빌드센 감독이 연출한 1992년작 <파워 오브 원>은 남아프리카 연방의 농장에서 태어난 소년이 교도소에서 권투를 배워 인종차별철폐 운동의 선구자가 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휴먼 드라마와 스포츠 영화, 청춘 로맨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파워 오브 원>은 심각한 인종문제를 배움으로 극복하려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노력을 잘 묘사한 영화였다.
1986년에 개봉한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로맨스 드라마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만든 가장 유명한 영화 중 하나다. 덴마크의 여성 소설가 고 카렌 블릭센이 쓴 자서전을 각색해 만든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28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 2억27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완성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으며 아카데미 7개 부문을 휩쓸었다.
우간다의 악명 높은 독재자 아디 아민을 소재로 쓴 소설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왕>을 영화화한 <라스트 킹>은 아디 아민 역을 맡은 배우 포레스트 휘태커의 명연기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휘태커는 사이코패스 독재자로 알려져 있던 아디 아민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 연기를 선보이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블러드 다이아몬드), 윌 스미스(<행복을 찾아서>) 등을 제치고 2007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마블 히어로 영화 중에도 아프리카 대륙이 등장하는 작품이 있다. 바로 아프리카의 가상국가 와칸다를 배경으로 한 <블랙팬서>다. 와칸다는 아프리카에서도 최빈국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사실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보다도 뛰어난 최첨단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세계 유일의 비브라늄 매장 국가다. 또한 마블영화의 팬이라면 언제 들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유행어 '와칸다 포에버'가 탄생한 나라이기도 하다.
코미디 배우로 오해했던 돈 치들의 인생연기
▲ 코믹한 이미지가 강했던 돈 치들은 <호텔 르완다>를 통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주)동숭아트센터
<호텔 르완다>는 작가 겸 기자 필립 고레비치의 저서 <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 걸, 제발 전해주세요> 에 실린 르완다 호텔 밀 콜린스의 지배인 폴 루세사바기나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르완다에서는 다수파 피지배계급 후투족과 소수파 지배계급 투치족의 내전 도중 1994년 4월부터 7월까지 약 3개월 동안 최소 50만에서 최대 100만 명의 희생자를 냈던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학살사건이 있었다.
17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든 <호텔 르완다>는 2004년 연말에 개봉해 3300만 달러 흥행으로 간신히 본전치기에 성공했다. 국내에서는 영화의 존재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가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면서 관객들에게 소개됐고 2006년 9월 국내에서 정식으로 개봉했다. 하지만 <호텔 르완다>는 전국 9개 스크린 밖에 확보하지 못하면서 전국 1만2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폴과 난민들은 호텔에 군대가 도착하면서 한숨을 돌리지만 군인들은 외국인들만 피신시킨다. 폴은 이후에도 UN의 도움으로 피신할 기회가 있었지만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난민들을 그냥 두고 갈 수 없어 호텔에 남는다. 미국과 프랑스 등 서방 강대국들의 외면 속에 몇 번이고 죽을 위기를 넘긴 폴과 난민들은 UN군과 국경을 넘어온 투치족 군대의 보호 아래 난민캠프로 탈출하고 그곳에서 처남부부의 자식들과 재회한다.
<호텔 르완다>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폴 역을 맡은 돈 치들의 열연이었다. <오션스> 시리즈에서 유쾌한 연기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줬던 돈 치들은 르완다 내전의 잔혹함 속에서도 난민들을 보호하는 폴 역을 멋지게 소화했다. 특히 길 전체에 시체가 깔려 있는 장면을 보고 호텔에 도착해서 넥타이를 매면서 오열하는 연기는 단연 일품이었다. 돈 치들은 <호텔 르완다>를 통해 커리어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됐다.
'아프리카판 <쉰들러 리스트>'로 불리기도 하는 <호텔 르완다>는 르완다 내전과 학살에 대한 선진국들의 외면과 무관심을 고발하고 있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서양 군대들은 후투족의 본격적인 학살이 시작되자 '자국민 보호'를 핑계로 르완다에서 철수해 버린다. 난민들이 애타게 기다렸던 서방국가 군인들도 외국인들만 태워 피신시키고 UN 평화유지군 역시 반란군으로부터 난민들을 전혀 보호해 주지 못했다.
'조커'부터 '레옹'까지… 화려한 조연 라인업
▲ 호아킨 피닉스는 <호텔 르완다>에서 르완다 내전을 취재하러 온 기자를 연기했다.ⓒ (주)동숭아트센터
단독주연을 맡은 돈 치들의 연기도 매우 훌륭했지만 <호텔 르완다>는 화려한 조연 라인업이 돋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조커>로 2020년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휩쓴 호아킨 피닉스는 <호텔 르완다>에서 투치족 여자와 사귀는 종군기자 잭 대글리쉬 역을 맡았다. 잭은 영화 중반 애인을 두고 홀로 르완다를 떠나는데 호텔 직원이 잭에게 우산을 씌워 주자 "제발 나 같은 놈에게 우산을 씌워 주지 마요"라며 수치스러워 한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이자 <사랑과 추억>으로 1992년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배우 닉 놀테는 <호텔 르완다>에서 UN 평화유지군의 지휘관 올리브 대령을 연기했다. 올리브 대령은 르완다 내전에 얼마나 개입할 거냐는 기자들의 물음에 "우리는 평화유지군으로 여기에 온 거지, 평화 '창조군'이 아니오"라고 일갈한다. 분쟁 종결이 목적이 아닌 UN 평화유지군의 한계를 한마디로 압죽한 표현이었다.
전 세계 많은 관객들에게 '영원한 레옹'으로 기억되고 있는 프랑스 배우 장 르노는 <호텔 르완다>에서 폴이 지배인으로 있는 밀 콜린스 호텔의 틸렌스 회장 역을 맡았다. 틸렌스 회장은 르완다가 아닌 다른 나라에 있어 내전과 학살사건을 직접적으로 목격하진 않지만 자신의 권한을 활용해 폴과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특히 영화 중반엔 프랑스 대통령과 통화해 호텔을 점거했던 후투족의 군대를 철수시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