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노인영화제, 서울국제환경영화제, 미쟝센 단편영화제도 작지만 빠뜨릴 수 없는 영화제다. 지원 중단으로 맥이 끊긴 강릉국제영화제를 위시해 지역의 작은 영화제도 꾸준히 찾으려 했다. 다큐인들이 중심이 되어 스스로의 축제를 만들어낸 반짝다큐페스티발, 부천의 노동관계 단체들이 힘을 모은 부천노동영화제도 빠뜨릴 수 없다.
영화제를 꾸준히 다닌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영화를 좋아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를 영화인으로 생각한 게 제법 된 이야기다. 열아홉 나이에 처음으로 청탁을 받았던 것부터가 영화와 관련된 글이었다. 그로부터 이십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족히 수천 편은 될 글을 잡지며 온라인 매체들에 실었다. 글뿐만이 아니다. 관객과의 대화 진행이며 뉴스에 얼굴을 비추고 영화 이야기를 하거나 방송 출연 같은 일을 하기도 했다.
▲ 라따뚜이 포스터ⓒ JIFF
발품 안 파는 평자, 고립되는 현장
그러며 느끼게 된 한 가지, 영화평론가로 영화 일을 해나갈수록 정작 영화와 관객이 만나는 현장과는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영화제야말로 그 대표라 할 만하다. 한국의 수많은 영화제 가운데 평론가며 기자가 찾는 영화제가 과연 몇이나 되는가. 각종 지원을 받고 겨우 현장을 찾은 이들이 중요 행사만 보고서 훌쩍 떠나는 일은 얼마나 많았나. 그마저도 찾지 않아서 평론 하나, 기사 한줄 나지 못하는 영화제는 또 얼마나 많았는지.
이따금 들른 작은 영화제에서 나는 내가 그 영화제를 찾은 유일한 평자임을 깨닫게 될 때가 많았다. 관계자들이 나와 감사를 표하는 말 속에서, 수많은 매체에서 그저 보도자료 이상의 무엇도 찾을 수 없었을 때, 나는 작은 영화제가 마주한 고립이 어떠한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와 세상과 만나려 영화제를 만든 것일 텐데, 실상 마주하는 것은 그들만의 축제가 되고 마는 나날들. 영화제에 제가 만든 영화를 출품하는, 어쩌면 극장에 걸릴 기회조차 잡지 못할 수많은 영화와 영화인에게도 그 하나의 평자가 얼마나 귀한 것일까를 생각하였다.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픽사 in 전주 with <인사이드 아웃 2>'에서 두 차례 상영된 <라따뚜이>는 평론의 가치를 일깨우는 작품이다. 흔히 알려진 요리와 요리사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영화는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나아가 평자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로 화한다.
▲ 라따뚜이 스틸컷ⓒ JIFF
프랑스 최고 꿈꾸는 요리하는 쥐
주인공인 레미는 프랑스 파리에서 살아가는 이다. 그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데, 다름 아닌 절대미각. 후각과 미각이 남다르게 발달한 그는 음식에 대한 열망마저 대단하여 프랑스 최고의 요리사를 꿈꾼다.
그러나 어느 영웅서사가 그러하듯 문제가 있다. 레미가 인간이 아닌 쥐라는 것. 인간의 주방에서 쥐는 그야말로 혐오의 대상, 위생을 위해 반드시 퇴치되어야 할 존재다. 그리하여 레미는 제 꿈을 이룰 길을 찾지 못하고 하수구를 맴돌 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레미는 하수구에서 길을 잃는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파리의 별 다섯 개짜리 최고급 레스토랑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보글거리는 수프와 둑닥이는 도마소리, 향긋한 허브 내음까지, 레미를 불타게 하는 것 투성이다. 참지 못한 레미가 주방에서 요리에 열중하는 순간, 그 모습을 요리견습생 링귀니가 발견한다.
브래드 버드가 이끈 픽사 스튜디오의 110분 짜리 애니메이션은 링귀니가 레미와 합심해 최고의 요리사로 거듭나는 과정을 다룬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무엇을 제공하며 함께 꿈을 향해 다가서는 모습이 감동을 준다. 레미와 링귀니가, 요리와 요리사가, 식당과 평론가가, 그렇게 서로에게 좋은 것을 주며 스스로를 일으켜 세운다.
▲ 라따뚜이 스틸컷ⓒ JIFF
감동과 박진감, 지금 보아도 끝내주는
지금의 디즈니를 있게 했던 캐릭터가 바로 미키 마우스다. 미키 마우스는 쥐고, 레미 또한 쥐다. 미키 마우스의 후예를 주인공으로 삼아서 디즈니와 픽사의 영웅담을 들려주는 이 깜찍한 영화가 놀랍다. 관객들은 디즈니의 고전들에서나 느낄 수 있었던 감동적인 이야기가 픽사의 진보한 기술력과 만나 폭발하는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눈에 띄게 독창적인 설정은 아닐지라도 <라따뚜이>가 안정적인 전개와 위트 넘치는 장면들이 어우러진 완성도 있는 결과물이라는 데 반박할 이는 없을 것이다.
<라따뚜이>는 지금 보아도 유치하지 않은 명장면 또한 여럿 낳았다. 하나는 레미와 주방장의 쫓고 쫓기는 추격신이다. 첩보액션물의 추격전을 방불케 하는 레미와 주방장의 추격신은 실제 배우가 아니어서 더욱 움직임이 자유로운 주방장의 비범한 액션소화력을 통하여 엄청난 박진감을 선사한다.
또 다른 한 장면을 꼽는다면, 까칠한 비평가 안톤 이고가 회심의 요리 '라따뚜이'를 입에 넣는 순간 펼쳐진 플래시백일 테다. 단박에 어린시절로 날아가는 플래시백과 그로부터 이어진 변화는 앞의 추격전이 준 스릴, 그 이상의 매력을 뿜어낸다.
영화 내내 까칠하게 그려진 평론가 이고가 실은 그와 같은 인물이 아니란 사실이 일종의 반전처럼 다가온다. 어린 시절 맛보았던 어머니의 맛을 만난 그가 긴 기다림 끝에 진실과 대면하고 보이는 성숙한 태도는 단순하고 감동적이기만 한 줄 알았던 디즈니의 영화에 비범한 깊이를 부여한다.
▲ 픽사 in 전주 with <인사이드 아웃 2> 현장 사진ⓒ JIFF
비평이 잊어서는 안 될 것
이고가 레미와 링귀니의 요리를 맛본 뒤 쓴 평론은 이 시대 발품 팔지 않는 평자에게, 현장과 산업의 고충을 돌아보지 않은 채 앉아서 쉬운 비평만 쏟아내는 이들에게 깊은 깨달음을 던진다.
이고는 쓴다.
다방면으로 보면, 비평이라는 일은 쉽다. 우리는 위험을 무릅쓸 일이 별로 없고, 우리의 판단에 바쳐진 사람들의 일과 그들 자신들의 위에서 군림하는 우리의 지위를 즐긴다. 우리는 쓰기에도, 읽기에도 재밌는 부정적인 비평을 통해 자란다. (중략) 하지만 비평가도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가 있으니, 그 때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보호할 때다. 세상은 가끔 새로운 것들에 친절하지 않다.
평자는 스스로가 새로운 가능성을 보호해야 하는 임무를 띄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친절하지 않은 세상에서 아직은 작고 여린 가능성을 보호하는 일, 이따금은 그로부터 빚어지는 훌륭한 예술이 있는 것이다. 발품을 팔고 노력을 기울여야 겨우 지켜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라따뚜이>는 아직은 창조성과 열정, 도전의식을 갖고 있던 디즈니와 픽사가 함께 빚어낸 명작이다. 예술과 예술가, 나아가 디즈니와 픽사의 열망을 그대로 투영한 역작이다. 17년 전 만들어진 이 장편 애니메이션이 그 긴 세월을 가로질러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픽사돔에서 수많은 관객을 감동시켜냈다는 사실은, 진짜 예술이 가진 힘은 쉽게 퇴색되지 않는다는 오랜 믿음을 확인시켜 준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