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의 씨네만세 722]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곰팡이>애니메이션은 고생스런 예술이다. 수많은 그림을 이어 붙여 움직이게 하고, 여기에 소리를 입혀 한 편의 애니를 만드는 과정이 하나하나 수고스럽다. AI 기술의 발전으로 애니에도 일대 변혁이 이루어지리란 평가가 없지 않지만 적어도 아직까진 인간이 품을 들여야 하는 구석이 수두룩하다. 노동력의 집결체, 작화와 이야기, 편집과 소리까지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는 게 애니의 수고로움이다.
이에 비한다면 실사영화란 얼마나 편리한가. 그저 카메라를 가져다 대기만 해도 움직이는 영상이 뚝딱 만들어진다. 물론 미장센에 신경 써야 하는 대목이 없지 않지만, 장소를 섭외하고 물건을 구하여 배치하는 일이 그 모두를 초당 수십, 심지어는 백 수십 프레임의 그림으로 창조하는 일보다 어려울 수는 없는 것이다. 애니 명장에게 장인소리가 흔히 따라붙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실사영화는 장편을 위해 단편을 만드는 예술이라고들 한다. 여러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들을 감행하면서 장편을 만들 수 있는 작가를 가려내는 작업이 단편에서 이뤄진다. 즉 극장에 걸리는 장편이야말로 영화예술의 원형이며 꽃이 된다.
전주가 주목한 한국 단편 애니메이션
▲ 곰팡이 스틸컷ⓒ JIFF
반면 애니는 단편이 그 모체다. 노동집약적인 태생적 속성이 오랜 기간 그 길이를 단편으로 고정해두었다. 애니가 장편화된 건 수많은 애니메이터를 고용한 대형 스튜디오가 탄생한 이후다. 말하자면 디즈니 같은 회사 말이다. 단편으로 발전한 애니는 그 안에 인간사 희노애락을, 작품의 완결성을 담고 구하려 든다. 그로부터 수많은 단편 명작들이 태어났으니 애니와 단편 사이의 상관관계는 실사영화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게 마련이다.
제25회 한국단편경쟁 부문에 오른 단편영화는 모두 25편이다. 이 중 3편이 애니다. 무려 1332편의 작품이 출품된 가운데 살아남은 애니는 3편, 생존률이 고작 0.002%다. 2023년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입학한 박한얼의 <곰팡이>는 그녀의 첫 애니 연출작으로, 이토록 좁은 문을 뚫어내는 성과를 올렸다. 전주국제영화제가 그녀를 한국 영화, 나아가 한국 애니의 미래로 평가했단 뜻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야기는 여러모로 독특하다. 독특함을 넘어 기괴하다는 평가도 어색하지 않다. 주인공은 30대 여성 J, 붉게 충혈된 눈이 어딘지 섬뜩하게 보인다. 초점 없는 눈으로 먼 무엇을 바라보는 그녀는 남편도, 아버지도 잃어버렸다. 하나 남은 어머니는 그녀의 현재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 아니겠나. 그녀의 모습은 어느 모로 보아도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 곰팡이 스틸컷ⓒ JIFF
죽어가는 것에 피어오르는 생명
배양이라 해도 좋을까. J는 욕조에서 곰팡이를 배양하기 시작한다. 곰팡이로 무엇을 만들고 그것과 요상하게 교감한다. 꿈틀대는 시뻘건 혓바닥과 곰팡이가 마주 닿는 불유쾌한 영상이 어딘지 낯선 감상을 일으킨다. 명확하게 흘러가지 않는 이야기가 도리어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의 선택을 받은 다수 단편, 그러니까 실험적이고 난해하며 일종의 자기폐쇄적 표현물의 일환처럼 보이기도 한다. 감독이 이로부터 표출하고 싶었던 것, 또 실험하고팠던 것이 무엇인지가 명확하게 잡히지 않는다.
GV자리에서 감독은 곰팡이를 소재로 삼은 이유에 대해 "죽어가는 것에 피어오르는 또 다른 생명체란 점에서 양면성을 느꼈다"고 답했다. 흔히 무엇이 썩어갈 때 곰팡이가 핀 모습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진균인 곰팡이가 양분 있는 무엇을 점령하고 번성하는 모습은 그들이 내뿜는 독소에 악영향을 받아온 인간에게 본능적 혐오감을 일으킨다.
특히 곰팡이가 무엇의 표면에 제 모습을 드러낼 즈음이면 실상 그 유기물은 완전히 곰팡이에게 장악된 것이나 다름없다. 곰팡이가 핀 부분을 제거하고 가열해 곰팡이 진균을 죽인다 해도 이미 그들이 생성한 독소만큼은 그대로인지라 버릴 수밖에 없다. 공기 중에 퍼져나가 인간의 건강을 해하고, 항생제로도 제압할 수 없어 때로 치명적 위협이 되기까지 한다. 인간이 곰팡이의 외면에 본능적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 곰팡이 스틸컷ⓒ JIFF
우주적 관점에선 인간 또한 곰팡이
그러나 감독은 곰팡이로부터 양면성을, 즉 생명의 모습을 포착하고 흥미를 느꼈다 말한다. 곰팡이라 해서 꼭 다른 생명 위에 터 잡는 것은 아니라지만, 대부분은 유기물로부터 양분을 얻으니 그 같은 착상이 꼭 틀린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생명이 다른 무엇이 가진 양분, 즉 생명력을 빨아 저를 번성케 한다는 점은 얼마쯤 우리 사는 모습을 생각게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류는 지구적, 또 우주적 관점에서 곰팡이와 얼마 다르지 않아 보인다. 곰팡이가 그야말로 어디에나 피어나듯, 인류 또한 그렇다. 가열하면 죽고 너무 추운 곳에서도 살 수 없다는 제약은 인간이나 곰팡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살기 좋은 곳에 터를 잡고 점차 제 영역의 주인이 되며 모든 양분을 빨아들이는 것은 인류나 곰팡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지구의 모든 자원을 뽑아 저를 위해 쓰는 인류다. 숲도, 광물도, 석유도, 가스도, 인류는 제약 없이 뽑아 활용해왔다. 인간이 지배한 지구는 이미 인간만을 위한 것이 된 지 오래다. 곰팡이가 장악한 치즈가 그러하듯.
J가 살고 있는 섬뜩한 집은 인간이 지배한 피폐해진 지구와 다르지 않다. 남편과 아버지가 죽고 난 J의 삶, 인류는 지난 시대 무엇을 잃어버렸나. 믿음을, 온갖 가치를 하나둘씩 잃어버리지는 않았나. 곰팡이를 키우고 그와 교감하는 J의 기괴함이 다시 무엇으로 빚어질지 영화는 보이지 않는다. 현대 과학이, AI기술과 맞물려 바야흐로 일대 혁명을 앞둔 인류의 미래가 어디로 연결될지 또한 우리는 알지 못한다.
작가 기근 겪는 한국영화, 가능성이 간절하다
따지자면 <곰팡이>는 곰팡이와 인류의 관계를 일종의 상징으로 읽어내는 게 가능한 영화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할 뿐 자연스럽거나 매끄럽거나 우아하게 관계 맺고 있다고 할 수 없는 수준에 머문다. 메타포는 멀찍이 따로 흩뿌려져 있고 실상과 상징 사이에 놓인 다리도 끊어져 있거나 부실하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메타포를 통하여 도달하는 목적지, 즉 메시지와 결론이 부재하단 점은 짙은 아쉬움을 남긴다.
적어도 전주국제영화제가 선택한 단편이라면 이 이상이 되었어야 하지 않았나 싶어 안타깝다. 한국 영화, 또 한국 애니의 미래를 열어갈 누구의 작품이라면 보다 완성도가 높은 서사를, 혹은 누구도 밟지 않은 곳까지 나아가려는 의지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믿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곰팡이>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 작품으로 남았다. 위의 해석이 의도한 메타포였든, 꿈보다 해몽이었든 간에 말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만든 이에게 박수를 보내게 된다. 곰팡이로부터 양면성을 포착하고 이를 바탕으로 작품을 꾸려가길 선택한 착상엔 본능적이라 해도 좋을 감각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어느 관점에선 결코 호의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종의 생존양식이 있다는 것, 그 생존방식으로부터 우리 종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곰팡이'란 소재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메타포와 그 효용이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이 영화가 지닐 수 있었던 가능성이라 해도 좋겠다.
수준급 차세대 작가의 기근을 겪고 있는 한국영화계에서 가능성은 그 자체로 귀하다. 그 가능성이 부디 한껏 피어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JIFF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