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결말이 미친 걸까, 아니면 세상이 미친 걸까

3377TV정보人气:851시간:2024-12-27

[리뷰] 영화 <서브스턴스> 영화 <서브스턴스> 스틸컷ⓒ 찬란
(*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고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걸 정도로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스타 배우 '엘리자베스'(데미 무어). 현재 그녀는 한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전락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프로그램에 임하던 그녀에게 갑작스러운 소식이 전해진다. 50살 생일날, '프로듀서 하비'(데니스 퀘이드)가 "어리고 섹시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녀를 해고한 것.

충격에 빠진 엘리자베스는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한 뒤 병원에 실려간다. 그곳에서 그녀의 인생은 180도 달라진다. 한 젊은 남성 간호사로부터 젊고 완벽한 신체를 만들 수 있다는 약물, '서브스턴스'를 소개받으면서다. 7일이라는 기간만 잘 지키면 원래 몸과 젊은 몸 모두 부작용이 없다는 말에 엘리자베스는 기꺼이 약물을 주사한다. 그렇게 탄생한 '수'(마가렛 퀄리)는 엘리자베스를 대신해 두 번째 인생을 누리기 시작한다.

샹그릴라 신드롬과 엔디미온

샹그릴라 신드롬. 제임스 힐턴의 1933년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평생 늙지 않고 영원한 젊음을 누릴 수 있는 가상의 지상낙원, '샹그릴라(Shangri-La)'의 이름을 본뜬 말이다.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늙지 않고 젊게 살고 싶은 욕구가 확산되는 사회적 현상을ㅑ 의미한다. 이 신드롬은 21세기에도 유효하다. 인기 연예인의 관리 비법은 언제나 관심사다. 중장년의 전유물도 아니다. 최근에는 세대 막론하고 저속노화 열풍이 불고 있다.

젊음을 향한 열망은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그리스에서는 달의 여신 셀레네와 목동 엔디미온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셀레네는 절세의 미남 엔디미온에게 반한 나머지 그가 잠들었을 때마다 그와 그의 양들을 지켜주었다. 사랑이 더 커진 셀레네는 그의 미모가 영원하기를 바랐다. 그녀는 제우스에게 부탁하여 그가 영원히 변함없이 깨어나지 않는 잠을 선사했고, 잠든 그와 관계를 가져 '메나에'라고 불리는 50명의 딸을 낳았다.

그런데 엔디미온 이야기는 샹그릴라 신드롬에 경종을 울리는 비극이기도 하다. 엔디미온은 영원한 젊음도, 가족도 전혀 알지 못하는 고통 속에 빠진 채 평생을 살았다. 태어나서 성장을 했다가 노화하여 안식, 즉 죽음에 이르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벗어난 대가인 셈이다.

코랄리 파르자 감독의 <서브스턴스>는 이 오래된 경고를 재해석한다. 신선한 연출, 파격적인 이미지, 달라진 시대상황을 곁들여서.

<서브스턴스>는 시작부터 범상치 않다. 잘 나가는 할리우드 스타였던 엘리자베스가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전락한 과정을 보여주는 시퀀스만 봐도 영화에 압도된다. 일반적인, 예측가능한 형태를 완전히 빗겨나가기 때문. 익숙한 형태는 다음과 같다. 엘리자베스가 화려한 시상식에 초청받고, 정신없는 파티를 즐기는 컷이 연달아 나온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출연 제의가 끊기고, 어두운 방에서 좌절하는 그녀를 카메라가 비춘다.

<서브스턴스>의 카메라는 전혀 다른 광경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배치된 엘리자베스의 별을 바로 위에서 비춘다. 별이 처음 제작된 후에는 그 주변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화려하게 터지고 여러 행사가 개최된다. 그녀의 별을 보러 온 팬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자 상황이 달라진다. 별 현판에는 금이 가고, 사람들은 마구 밟고 다닌다. 그녀의 이름을 아예 모르는 행인들이 늘어나고, 심지어 먹던 햄버거를 떨어져서 소스가 묻어도 치우는 시늉만 하고 지나간다. 이 짧은 컷들의 조합만으로도 정상에서 서서히 내려온 엘리자베스의 현재 상황, 감정, 욕망, 결핍이 모두 전달된다. 직관적인 이해가 가능한 이 오프닝은 배우의 부재 덕분에 더욱 인상적이다.

놀라운 이미지의 향연

 영화 <서브스턴스> 스틸컷ⓒ 찬란
이미지 활용 능력도 탁월하다. 젊음과 탐욕이라는 두 키워드가 스크린에서 넘쳐흐르는 듯하다. 엘리자베스의 몸을 비집고 나온 수가 처음으로 자기 얼굴과 몸을 거울에 비춰보며 만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엘리자베스가 진행자였던 에어로빅 쇼의 새 출연자 오디션 장면도 마찬가지다. 수의 신체 곳곳을 비추는 대목은 마치 여성의 젊음과 육체미를 노골적으로 찬양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와 대비되는 음식의 이미지는 기괴한 만큼 소름 끼친다. 하비는 엘리자베스와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그녀의 해고 소식을 전한다. 더 젊고, 아름다운 신체를 지닌 진행자가 필요하다면서. 이 자리에서 하비는 새우를 게걸스럽게 까먹는다. 저작활동은 손과 입가가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엘리자베스의 심경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그의 욕망을 대신 보여주는 듯하다.

수가 유명해질수록 엘리자베스의 폭식증이 심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수가 음식을 광적으로 먹어치우는 모습뿐만 아니라, 그녀가 식사를 마친 후의 잔해가 더 눈에 띈다. 그녀가 먹어 치운 음식의 잔해는 앙상하고 피폐하다. 닭을 먹으면 기름이 흥건한 접시 위에 살점이 일부 붙은 뼈만 남긴다. 이 잔해더미는 수에게 생명력을 뺏긴 채 나날이 껍데기만 남고 생기를 잃어가는 엘리자베스의 모습과 같다.

독특한 오프닝과 이미지의 조합은 <서브스턴스>의 메시지가 극대화되는 환경을 마련해 준다. 겉보기에 <서브스턴스>의 메시지는 엔디미온과 셀레네의 사랑 이야기와 같다. 젊음을 욕망하다가 자기 인생을 파괴하는 주인공에 대한 비판이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애 과정을 부정하고 이를 벗어나려는 탐욕과 그 선택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서브스턴스>는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젊음을 욕망하고,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개개인의 노력을 탓하지 않는다. 개인의 욕구를 부추기는 시스템을 최종적으로 비판한다. 그 중심에는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쇼 비즈니스가 있다. 즉, 영화나 TV 같은 미디어가 젊어지고 싶고, 젊음만이 좋은 것이라는 욕망을 끊임없이 주입한다는 것. 젊음을 유지하지 못한 사람은 가치가 없는 인물로 매도하는 시스템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말이다.

수가 밤에 거대한 광고판을 보는 장면만 봐도 알 수 있다. 자기 화보를 보던 그녀는 7일이 지났는데도 원래 몸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더 빨리 늙고 미라로 변해도, 젊은 몸을 유지하기로 결심한다. 그러지 않으면 수도 언제든 경쟁에서 밀려날 수 있으니까. 엘리자베스가 하루아침에 에어로빅 쇼에서 해고됐듯이. 즉, 지금과 같은 시스템 하에서 개인은 젊어지지 않아도, 젊어지려고 해도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에어로빅쇼 스튜디오 복도의 모습도 흥미롭다. 좁고 긴 복도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야 할 것 같은 갑갑함을 조성한다. 실제로 엘리자베스가 해고당할 것이라는 소식도 듣고, 자기 물품과 무성의한 선물을 받는 공간도 모두 이 복도다. 즉, 이 복도는 TV 쇼에서 살아남을 정도로 젊고 매력적이면 안 된다는 강박과 시스템의 원리를 시각화한 공간인 셈이다.

시스템을 향한 반란

 영화 <서브스턴스> 스틸컷ⓒ 찬란
클라이맥스는 충격적인 이미지로써 쇼 비즈니스 시스템의 내재적 문제를 직격한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뒤틀린 괴물의 생김새만 봐도 그렇다. 이 괴물은 코 대신 가슴이 얼굴에 달렸다. 여성 지원자들의 몸매를 품평하던 면접관들의 말 그대로다. 그들의 성희롱이 단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인 만큼, 엘리자베스라는 괴물은 영화가 지적한 모든 문제가 한 데 모여 형상화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극장 시퀀스도 호불호가 나뉠지언정 분명 의미심장하다. 괴물이 된 엘리자베스는 무대 위에 오른 뒤, 온몸으로 피를 내뿜는다. 무대와 관객석은 피바다로 변하고, 자리에 앉아 있던 관객들도 모두 피칠갑된다. 이는 호러라는 장르적 쾌감 못지않게 서사적으로도 중요한 갈무리다. 시스템의 피해자인 엘리자베스가 시스템에 종사한 모든 이들에게 복수하고, 그녀의 피에 그들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헝거게임>에서 캣니스가 화살을 날리는 장면을 연상할 수도 있다. 그녀는 매번 헝거게임이라는 시스템을 유지한 이들에게 활을 쐈다. 게임메이커에게, 스노우 대통령에게, 코인 대통령에게. 그렇게 그녀는 헝거게임 게임장을, 더 나아가서 판엠이라는 시스템 자체를 전복했다. 캣니스에게 활과 화살이 있었다면, 엘리자베스에게는 피가 있었던 셈이다. 차이점이라면, 캣니스는 성공했고 엘리자베스는 실패했다는 것 뿐이다.

그런데 엘리자베스의 반란은 보이는 것에 비해 감정적으로는 그다지 놀랍지 않다. 물론 그녀의 반란 자체는 인상적이다. 군더더기 없는 전개 덕분에 그녀의 이야기는 세련됐고, 깔끔하다. 약물을 만든 흑막에 대해서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엘리자베스와 수 외의 인물은 최소한의 역할만 하고 빠진다. 자연히 엘리자베스와 수의 관계, 그들의 욕망이 낳은 비극에만 몰입할 수 있다.

다만, 큰 틀에서 보면 충격적인 이미지나 기교에 비해 내용물이 예측가능하다. 더 젊은 '나'가 무절제한 삶을 누리고, 무분별하게 젊음에 취해 살다가 본래 자기 자신과 함께 파멸한다는 이야기는 여러 SF 영화 등에서 익숙하다. 즉, 오프닝 시퀀스나 식사 장면, 그리고 엘리자베스 몸에서 수가 빠져나오는 장면에서의 발칙한 상상력이 서사적인 측면에서는 발휘되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현대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관통한 <서브스턴스>의 통찰은 중요성에 비해 충분히 날카롭지 않다. 시각적으로는 놀랍도록 기괴한 경험을 했지만, 이미지가 남긴 충격에 이야기의 메시지가 묻혀 버린다. 엘리자베스가 자기 별 현판 위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수미상관 결말이 오프닝만큼 뇌리에 각인되지는 않는 이유다. 결국 <서브스턴스>는 2%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우지 못한 채 막을 내린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potter1113)와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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