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 <여행자의 필요>
“언어와 언어 사이의 시간을 물색하는, 번역가의 영화.”(이보라) 홍상수 감독의 31번째 장편영화 <여행자의 필요>가 2위와 크게 격차를 벌리며 1위로 올라섰다. 극 중 이리스(이자벨 위페르)는 프랑스어 교습을 통해 인물 개개인의 감정을 깊게 어루만지는데 “그건 홍상수가 영화를 찍고 보여줌으로써 시도해온 무엇과 다르지 않은 듯”(남선우) 느껴진다. 윤동주의 시비 앞에서 이리스가 멈춰 섰을 때 생겨나는 정동, “이자벨 위페르와 윤동주의 신기한 결합”(듀나)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외국인 배우를 기용해 외국어로 극 전반을 채운 영화를 한국어를 하는 한국인으로서 겪을 수 있어 충만”(남선우)함을 느끼게 하는 한편 “<다른나라에서> <클레어의 카메라> <여행자의 필요>로 연작을 묶어본다면, 이번 작품은 홍상수 영화의 여행자로서 이자벨 위페르의 필요 또한 절감케”(김소미) 한다.
끊임없이 어디론가 이동하는 이리스의 뒷모습은 “잠깐 머물렀다 가는 여행자의 태도를 영화적 조건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김예솔비)라는 질문에 대한 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망각한 상실을 다시 상실하는 여정”(김소희)을 바라보는 관객에게 영화는 “세상의 표면으로 이끄는 여행자의 신묘한 마법”(정지혜)을 부린다. “시와 음악, 외국어, 그리고 나 아닌 타인이라는 이질적인 언어들을 하나로 묶은 홍상수는 여전히 뛰어난 번역가”(문주화)라고 할 수 있을 테다. 이리스가 머무는 시간, 공간, 대화 등 카메라가 “배우를 포착하는 모든 프레임이 아름답”(이지현)고 “인물의 투명도에 대한 화면의 성찰”(김예솔비)을 확인할 수 있기에, <여행자의 필요>는 90분 동안 “삶이 주는 작은 빛남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이지현)는 자리를 마련한다. “이는 그 어느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독보적 세계의 실현”(허남웅)이다.
2위 <파묘>
장재현 감독의 <파묘>는 2024년 <씨네21>의 ‘올해의 영화, 올해의 영화인’ 설문에서 가장 다양한 파트에 호명된 영화다. 그 결과 올해의 감독(장재현), 올해의 여자배우(김고은), 올해의 촬영감독(이모개)에 이어 ‘한국영화 베스트5’에서도 2위라는 높은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필자들은 <파묘>가 장르, 주제 등 다방면에서 “매우 다양한 것이 혼합”(이지현)됐으며 그럼에도 “그 다양성 사이의 관계가 모호하지 않다”(이지현)는 지점에 주목했다. “혹평하면 잡탕이지만 호평하면 기발하고 충실한 연결”(김성찬)이라는 점이 다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동서양 오컬트 클리셰를 호기롭게 다루면서 비판을 개의치 않고 정치적 주장마저 뚝심 있게 드러낸 것도 마음에 든다”(김성찬)라는 솔직한 애정이 담긴 평도 도착했다. 결과적으로 <파묘>는 “오컬트의 현대화”(이자연), “오컬트 장르의 대중적 개척”(황진미)을 이뤄냈고 “선명하고 강렬하게 관객을 압도하는 힘”(황진미)으로 2024년의 첫 천만 영화로 기록됐다. <검은 사제들> <사하바> 등 “우직하게 한 분야를 판 작가가 드디어 세상의 합당한 평가를 받았다”(김철홍)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장르와 타깃이 확고하게 정해져”(이지현) 있는 영화로 “<파묘>에 어울리는 영화 마케팅도 손에 꼽히는 사례” (이자연)였다는 사실 또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장르의 규칙을 갖고 놀 줄 아는, <괴물> 이후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국 대중영화”(이우빈)를 완성해낸 장재현 감독의 다음 행보를 기대해본다.
3위 <장손>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3관왕에 올랐던 <장손>은 개봉 이후 연말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다수의 지지를 받아온 영화다. 3대가 모여 살던 성진(강승호)네 가족은 할머니의 죽음 이후 저마다 숨겨뒀던 자신들의 욕망을 내보인다. 조부모의 기대와 관심을 독차지해온 3대 독자 성진, 즉 “가부장제의 최후 수혜자인 제3세대 남성이 관찰하고 방관하는 구조라는 점”(정재현)과 더불어 “혈연주의 가부장제의 섬뜩한 심연을 젠더, 세대, 계급 등 다각도에서 구조하는 힘을 보여준”(김소미) 점이 인상적이라는 평이 많았다. 인물들의 “누군가의 삶을 지지한다는 착각, 누군가의 불행에 가담해왔다는 저버릴 수 없는 원죄적 고통”(문주화)은 시종 차분하고 서늘하게 묘사된다. 다만 영화에서는 “가부장제를 해체하겠다는 공격적인 태도보다는 가족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관한 호기심이 두드러지”(이유채)는데 그래서인지 “백년의 한국 역사를 경상도 가부장제 안에서 풀면서 놓치는 것 하나 없고, 객관적인 만큼이나 신선”(듀나)함이 돋보인다. 요컨대 <장손>은 “하얗게 각이 진 외양이지만 한손으로도 으깰 수 있는 두부, 그 두부의 속성을 빼닮은 가부장적 가족주의를 한 집안의 세 계절로 압축한 수작”(남선우)이다. “임권택의 뒤를 잇는 직통의 한국영화”(듀나), “미래가 불투명한 한국영화라는 가문의 대를 이어갈 영화”(김철홍)라며 호평받은 <장손>에는 “지금 당장이 아닌 미래에 펼쳐질 재능의 증거”(김영진)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미더운 신인감독의 등장이 반갑다.
4위 <수유천>
1위에 오른 <여행자의 필요>에 이어 홍상수 감독의 <수유천>이 4위에 이름을 올렸다. 대학 강사 전임(김민희)은 배우 겸 연출자인 자신의 외삼촌(권해효)에게 학과 내의 촌극 연출을 부탁한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제대로 업무를 이어가지 못하던 외삼촌은 학생들과 천천히 삶을 나누고 극을 완성해간다. 수유천을 배경으로 유유히 그림을 그러거나 새롭게 인연을 시작하는 인물들의 여정을 통해 김성찬 평론가는 “자연을 바라보는 홍상수의 시선이 달이 비워지고 기우는 우주로까지 뻗는 걸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달리 말해 <수유천>은 “풍경이 아니라 그 풍경을 담아내는 시선을 탐구하는 영화”(이지현)이다. 그런 맥락에서 <수유천>은 홍상수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방식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홍상수는 어떠한 구상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존재했던 현상을 재현하기 위해 시네마를 이용한다. 각인이 아니라 사물의 흐름을 포착하고 시간의 가치를 표현하는 예술로서의 영화”(이지현)를 말이다. “무(無)가 되어 되돌아온 천진한 얼굴, 그 앞에서 비로소 다시 시작하리라는 믿음에 관해”(정지혜) <수유천>은 담담히 이야기를 전개한다. “동어반복이라는 오래된 푸념을 인정하면서도, 엔딩 시퀀스에서 김민희의 연기를 넋 놓고 보는 동시에 홍상수의 다음 작품을 열렬히 기다리게”(문주화) 하는 이유, “아무것이 없어도 앞으로도 계속 그의 영화를 보고 싶” (김성찬)게 만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5위 <리볼버>
오승욱 감독과 전도연 배우의 재회에서 <무뢰한>의 처연함을 기대한 이들에게 <리볼버>는 전혀 다른 인상을 안겼다. 비리에 엮여 대신 수감 생활을 한 수영(전도연)은 약속된 보상을 받기 위해 장전된 총을 들고 관련 인물들을 하나둘 찾아간다. 그러나 복수를 꿈꾸는 인물치고 수영은 “사실 의지가 없는 인물로서 노쇠나 탈진”(김성찬)과 다름없는 의미의 얼굴을 소유하고 있는데 한편으론 “그런 처연함을 오래 음미하고 싶”(김성찬)게 만든다. 수영을 비롯한 인물들은 “자신의 열망을 위해 구불구불한 제각각의 경로를 달린다”(이지현). 그 결과가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리볼버>가 매달리는 암울함의 정서에 수긍”하게 만든다고 이지현 평론가는 말한다. 9년 만의 신작인 만큼 오승욱 감독은 섬세하게 공을 들이며 “숏 하나, 숏들의 연결에서 무엇이 영화적인가를 추구“(김영진)하는 본연의 솜씨를 자랑한다. 그런 와중에도 “누아르라는 장르의 쾌감을 물성적으로 구현하려는 시도”(김예솔비)를 꾀하고, “극영화의 뒤틀린 어법으로 도달한 최상의 유희”(이우빈)를 선보인다. “인간의 얼굴을 하고 와 통각을 일깨우”(정지혜)는 <리볼버>의 정취는 “오승욱 감독의 전작 <무뢰한>과 고전들의 그림자에서 능청스럽게 비껴나, 관람 후 시간이 지날수록 묘연한 감흥의 연기를 피워올린다”(김소희). “한국 누아르 멜로의 기억할 만한, 의도된 오발탄”(김소미)인 <리볼버>에 관한 “아쉬움을 장전한 채 이 영화를 다시 이야기할 순간을 기다린다”(문주화).